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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세요?” “정릉 살아요.” 외부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주저없이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답한다.

유네스코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정릉 때문에 마을 이름이 아이콘화 된 곳, 바로 정릉이다.

다른 곳에 있는 왕릉과 달리 정릉은 자연스럽게 마을 이름이 됐다. 마을 사람들에게 정릉은 그래서 더 친근하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 정릉을 돌아보고, 마을 골목길을 걸으며 마을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작정하고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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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을 탐방하기 위해 모인 마을여행 참가자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릉을 탐방하기 위해 모인 마을여행 참가자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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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 성북구 정릉 매표소 앞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정릉교수단지로 마을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다. 마을여행은 마을공동체가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서울의 21개 마을에서 마을박람회 기간 중 각각 진행됐다.

마을의 역사를 알아보고 마을에 남아있는 역사문화적인 장소를 돌아보는 것은 물론 마을을 돌아보며 마을 사람들이 살고있는 면면을 살펴보는 짧지만 의미있는 일정으로 신청자들이 많아 조기 마감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번 정릉교수단지 마을여행은 강희정 대표(도토리문화학교)의 해설로 진행됐다. 정릉교수단지 주민들과 ‘역사문화마을만들기’ 지원사업을 함께 진행한 도토리문화학교는 그간 정릉교수단지의 역사문화 콘텐츠 개발 프로젝트를 주민들과 함께 진행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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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의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다

▲ 정릉의 능침공간을 돌아보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릉의 능침공간을 돌아보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김영옥 마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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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여행의 첫 탐방 코스는 단연 조선왕릉 정릉이다.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은 42기가 남아 있다. 40기는 남쪽에, 2기는 북쪽에 남아 있고 남쪽에 남은 40기는 모두 2009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정릉(貞陵)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조선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덕왕후의 능으로, 조선의 왕릉 42기 중 첫 번째로 만들어졌다.

태조 이성계의 사랑을 듬뿍 받은 신덕왕후는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태조는 궐 가까운 중구 정동에 능을 만들고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흥천사를 세웠다.

하지만 태종 9년에 능은 성북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고 능의 석물로는 광통교를 돌다리로 짓는데 사용됐다. 능 앞에 있는 사각 장명등은 고려 양식을 계승한 가장 큰 장명등이라고 한다. 신덕왕후의 원찰인 흥천사도 이후(정조 시기)에 성북구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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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고려 양식을 계승한 장명등은 크고 화려하다. 혼유석의 고석이 보통은 네개이나 두개인 것이 특이하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고려 양식을 계승한 장명등은 크고 화려하다. 혼유석의 고석이 보통은 네개이나 두개인 것이 특이하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원찰 흥천사(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원찰 흥천사(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릉과 정릉의 정자각을 돌아보고 신도를 밟지않도록 조심하며 가는 참가자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릉과 정릉의 정자각을 돌아보고 신도를 밟지않도록 조심하며 가는 참가자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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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은 주택가와 바로 인접해 있어 다른 왕릉에 비해 사람들의 방문이 빈번한 편이다. 특히 정릉교수단지 주민들이 산책을 하거나 근처 어린이집 어린이들의 현장학습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능 안의 수령 오래된 나무가 많은 숲은 마을 주민 모두에게 휴식의 장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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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의 앞쪽은 재개발로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릉의 앞쪽은 재개발로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사진=김영옥 마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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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에게 친근한 정릉은 개발 바람으로 차츰 주변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정릉의 정면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어 조망이 불편할 정도였다.

유럽의 정원 건축가들이 조선의 왕릉을 신들의 정원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탁 트인 공간이 일품이라 했다지만 정릉 주변의 무분별한 개발은 이 같은 평가를 무색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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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 교수단지를 지키려는 주민들의 아름다운 노력

▲ 정릉 바로 앞에 있는 정사모 (정릉을 사랑하는 모임, 현 정릉마실) 사무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릉 바로 앞에 있는 정사모 (정릉을 사랑하는 모임, 현 정릉마실) 사무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사모 사무실에 모인 회원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정사모 사무실에 모인 회원들(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책으로도 나온 정릉교수단지 마을 이야기(사진=김영옥 마을기자)

▲ 책으로도 나온 정릉교수단지 마을 이야기(사진=김영옥 마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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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대학교 주택조합에서 문화재관리국(현재 문화재청)으로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조성된 정릉 바로 옆 주택단지는 당시 대다수의 교수들이 이곳에 주택을 조성하면서 교수단지로 불리게 됐다.

조성될 당시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한 단독 주택들이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정릉 교수단지는 2000년경부터 위기를 맞았다.

정릉 주변이 재개발 되면서 교수단지의 재개발을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들로 갈렸다.

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교수단지 옆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정릉 주변이 더 이상 개발로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릉과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제작해 유네스코에 제출하는가 하면 주민모임 ‘정사모(정릉을 사랑하는 모임, 현 정릉마실)’를 만들고, 교수단지 개발을 반대하는 의미로 각자의 집 대문에 예쁜 화분들을 내걸기 시작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2011년 정릉교수단지 재개발은 부결됐다. 하지만 다시 점화될지 모를 재개발의 불씨를 진화하기 위해 주민들이 나섰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인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역사문화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도토리문화학교의 자문을 얻어 사료와 신문기사를 통한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료 조사를 진행했고, 마을에 오래 산 주민들의 구술을 통해 정릉의 이야기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정릉교수단지에 거주 중이며 정릉의 마지막 능참봉의 후손은 물론 교수단지가 조성될 당시부터 현재까지 거주중인 90세 마을 주민, 선대에 교수단지에 정착해 2대째 살고 있는 주민, 결혼 후 교수단지에 살고 있는 주민 등 교수단지 주민들이 들려주는 마을의 이야기들은 마을을 지켜내야 하는 이유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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